엇그제,
고은이의 첫 통장을 만들어주기 위해
회사 앞 작은 도장가게에서 도장을 하나 팠다.
작은 콜라병 같은 유선형 몸집에 겨우 5cm가 될까한 길이의,
뚜껑이 달린 짙은 갈색의 도장.
내가 처음 도장을 가지게 된 때를 기억해 보았다.
내가 첫 도장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그 땐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았던 학교에서 만들어주는 농협 적금 통장을 만들기 위해
아마도 어머니가 그냥 동네 아무 도장가게에서 파온 막도장이었을 것이다.
그 도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고,
그 다음에 도장을 가졌던 것은
고등학교 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만들었던 또 하나의 막도장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살아가면서는 거의 쓸 일도 없어 관심도 없던 도장에 처음 관심이을 가졌던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지어지기 전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던 집의
지하실에서 본 아버지의 학창시절 책들을 읽으면서 였다.
낡은 책들에 어김없이 찍혀있던 아버지의 장서인이 어찌나 멋있었는지,
나도 나중에 멋진 장서인을 하나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는 대학에 갔지만,
내 형편에 비싼 장서인(그리고 그것을 만드는 곳도 알지 못했다)을 가질 수도 없어서 그냥 마음 한구석에서 그리워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대학원을 다니던 어느 때,
가끔은 도장을 쓸일이 있었지만, 대충 서명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길을 가던 어느 날
학교앞 골목길에 어떤 초라한 영감님이 좌판을 깔고 도장을 팔고 있었다.
도장 하나 파는데 2,000원이면 족하던 시절
겨우 1,000원에 막도장을 파주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도장이나 파는 늙은이를 버스 기다리며 보다가 왜그랬는지 모르게
도장 하나를 파달라고 했고,
영감님은 당연스레 막도장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땐 또 무슨 생각이었는지
작은 검은 플라스틱 도장으로 다시 골랐고,
영감님이 때묻은 투박한 손으로 작은 도장을 잡고 꿈지럭거리며 도장을 파기 시작하는데,
내 이름의 성이 거의 다 파갈무렵.
영감님의 손에서 도장을 넘겨받아 글씨를 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옆에서 영감님의 코치를 받아가며 한자한자 내 이름을 파가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내 손에는,
내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들려 있었다.
물론 서툰 솜씨에 여기저기 흠집도 있고, 글자 중간에 그어져 버린 실수도 있었지만,
내 손으로 판 첫 도장.
아직도 내겐 가장 자주 쓰는 훌륭한 도장이다.
그 후엔
한자로 쓰여진 도장이 갖고 싶어
또 길가다 들어간 작은 도장집에서 한자로 새겨진 도장을 갖기도 했고,
어머니가 중국에 가셨다가 사오신 폼나는 도장을 선물받았고,
결혼 전 아내가 장서인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에겐 최고의 도장이 바로 내가 직접 새겼던 이 도장이다.
이제는 도장 쓸일도 없지만,
그랟 내가 사회인으로서 뭔가 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많은 기록들의 마지막을 장식해주는 도장.
엇그제
딸아이의 첫 도장은
한자로 새기고 싶었다.
흔한 한글도장보다 기품이랄 것도 없는 낡은 전통일지 모르지만
어릴 때에는 한자로 쓰여진 내 이름이 붉게 새겨지는게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그런 마음에 조금 비싸더라도 한자로 판 도장을 주고 싶었다.
도장을 파러 갔더니,
왠걸.
이곳은 손으로 파주는 도장이 아니라,
컴퓨터로 파주는 도장이다.
이젠 대부분의 가게에서 그렇게 컴퓨터로 도장을 파주지만,
(손으로 파주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실,
컴퓨터 도장은 위조도 슆고
도장쟁이의 정성도 없어보여
나는 별로 신뢰하지 못한다.
손으로 파주는 도장이야 말로
진짜 도장이니까.
다시는 똑같은 도장을 팔 수 없도록 손으로 한자한자 가루 날려가며 판 도장이야 말로
진짜 도장이니까.
내 첫딸 고은이의 첫 도장은
안타깝지만
컴퓨터로 쉽게 파버린 도장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아빠처럼 손으로 소중하게 깎은
손때 가득한 도장과 장서인을 선물해 주려한다.